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 마문 (문단 편집) ==== 외치 ==== 알 마문은 즉위 이래 수많은 반란을 수습하느라 외세를 상대로 소극적으로 처신했고, 동로마 제국군은 이 틈을 타 아바스 왕조의 영역에 거주하던 기독교인들을 납치하여 자신들의 영역으로 강제로 정착시켰다. 그러던 820년, [[슬라브인 토마스]]가 [[미하일 2세]]를 상대로 8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 반란을 일으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동로마 제국은 이 반란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이슬람 세력은 이 때를 틈타 동로마 제국을 연이어 공격해 시칠리아와 크레타를 침략했다. 크레타는 아랍 세력의 수중에 쉽게 들어갔지만, 시칠리아에서는 현지 동로마군과 주민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격퇴되었다. 단 둘 다 압바스 왕조의 직할 병력이 아니었고, 시칠리아는 명목상으로는 압바스의 종주권 하에 있던 [[아글라브 왕조]]가 경략했던 것인 한편 크레타는 [[후우마이야 왕조]]에서 탈출한 일종의 외인부대가 점령했던 것이라서 압바스와는 전혀 무관하다. 829년 미하일 2세 사후 황위에 오른 [[테오필로스]]는 재위 내내 아랍 세력과 전쟁을 치렀다. 830년, 아랍인들은 시칠리아로 돌아와 팔레르모를 공략하고 자신들의 거점으로 삼았다. 한편 알 마문은 830년 아나톨리아로 쳐들어가 타우루스 산맥의 여러 요새를 공략하고 지난날 동로마 제국으로 끌려갔던 백성들을 도로 아바스 왕조의 영역으로 데려갔다. 테오필로스는 이에 맞서 831년 타르수스를 공략하고 무슬림 1,600명을 살해했다. 그해 가을 아랍군이 반격을 가하여 [[카파도키아]]에 주둔한 동로마군을 격파했다. 833년, 알 마문이 재차 카파도키아를 침공해 동로마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테오필로스는 사정이 나빠지자 금화 10만 개와 아랍 포로 7천 명을 석방하는 대가로 평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 이렇듯 동로마 제국과 연이은 전쟁을 치렀지만, 그 와중에도 문화 교류를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동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 가장 유명한 필사본들을 모아서 아랍어로 번역하게 했다. 또한 그는 평화 조약을 맺는 조건으로 테오필로스가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수학 논문인 "알마게스트"의 사본을 넘겨주는 것을 내걸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